연극 <파란 상자>를 관람하다

2022. 9. 3. 15:26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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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파란 상자가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파란 상자가 있나요? 연극 <파란 상자>

 

1. 연극 <파란 상자>를 관람하다

 

스폿라잇 액팅 원데이 클래스에 강사로 참여해 주신 우혜린 배우, 최치원 배우, 이시맥 배우가 출연한 연극 <파란 상자>. 안면이 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우혜린 배우가 쓴 작품이었던 만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인터넷에 올라온 <파란 상자> 소개문을 보았을 때 이 연극이 어떤 느낌일지 사뭇 궁금했다. ‘파란 상자’가 무슨 의미일지 궁금했고, 우혜린 배우의 마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40분이라는, 연극치고는 상당히 짧은 러닝타임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연극 <파란 상자>가 공연된 신촌 아트스페이스 블루스크린.

 

연극은 ‘다인(이시맥 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자신에게는 언젠가부터 파란 상자가 생겼다는, 다른 사람들은 파란 상자를 보지 못한다는, 그리고 그 파란 상자가 자신을 슬프게 만든다는. 보이지도 않는 파란 상자가 자신을 슬프게 한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다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들인 ‘유진’과 ‘희수’를 만나 즐겁게 추억을 얘기하지만, 그들에게도 파란 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유진은 자살로 세상을 떠나고, 다인은 그제야 유진에게도 파란 상자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녀가 남긴 파란 상자까지 안고 살아가게 된다. 다인은 파란 상자를 긁어도 보고, 가위로 찔러도 보지만, 상자는 절대 파괴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다인은 희수에게 파란 상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지만, 희수는 유진도 다인도 이해하지 못한다. 보이지도 않는 파란 상자를 어떻게 믿냐고, 자신은 동생의 죽음도 극복했는데 파란 상자 따위로 죽을 수 있냐고 그는 묻는다.

 

“힘들게 하는 게 있다고 말하면! 같이 데리고 다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같이 수영도 하고! 왜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다인은 의사와 상담하면서 파란 상자에 대해 말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연인 ‘지원’뿐이다. 그녀는 다인의 파란 상자를 보지 못하지만 다인을 힘들게 하는 파란 상자의 존재는 믿는다. 그녀는 때때로 우울해지고 슬퍼하는 다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또 내 마음에 비가 내리면 어떡해?”

“그럼 너의 물방울을 닦아줄게.”

 

다인은 파란 상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자를 가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없어지지 않을 파란 상자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그의 꿈에 유진이 나타나 작별을 고하며 연극은 끝을 맺는다.

 

 

2. 파란 상자는 무엇일까

 

극중 중요한 소재인 ‘파란 상자’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반응, 특히 희수의 반응을 통해 파란 상자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나에게 있고, 간혹 남에게 있는 것.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는 않는 것. 이해해주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 노력해도 없어지지 않고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 그리고 긁고 상처를 내 보아도 자신만 괴로워지는 것. 아마 가장 직관적인 답은 ‘우울증’ 일 것이다.

 

물론 파란 상자가 꼭 우울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떨쳐낼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잊으려고 애쓸수록 자신을 옥죄어오는 끔찍한 기억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도 기원을 알 수 없는 마음속의 응어리일 수도 있다. 머리보다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들을 문장으로 서술하기 어렵듯이, 이 막연하고 부정적이며 울적한 감정과 그 기원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기도 참 어렵다. 작가가 ‘파란 상자’라는 물체로 그러한 감정들을 투영한 것은 아마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 아픈 기억, 마음의 상처,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파란 상자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파란 상자를 짊어지는 사람도, 파란 상자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도, 그리고 파란 상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잖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현실 속의 우리가 그렇듯이 파란 상자에 제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3. 희수에 대하여

 

앞서 말했듯이, 파란 상자의 정체에 대해 가장 큰 단서를 주는 사람은 희수이다. 그는 군인답게 강직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동생의 죽음을 극복했듯이 남들도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 고통을 말하지 않냐고, 왜 자신은 극복한 고통을 극복할 수 없냐고 반문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희수는 극중에서 부정적이고 때로는 답답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우리라고 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뉴스에서 유명인의 자살 소식을 보고, “왜 저런 이유로 자살하지? 그걸 왜 못 이겨내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가? 주변 사람이 되도 않는 이유로 고민하는 것을 보고, “그게 뭐라고 그렇게 힘들어하나.”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가? 군대나 직장에서 우울함에 시달리는 지인을 보고, “남들도 다 하는 거 왜 너만 힘들어해?”라고 말한 적은 없었는가? 혹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나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자신 있게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고 가지고 있는 파란 상자도 다르기에, 우리는 남의 파란 상자를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 희수는 그러한 인간상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고전 명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은 의자와 책상을 구둣발로 밟고 올라서며 억압에 저항한다. 의도한 연출은 아니었겠지만, <파란 상자>에서도 희수는 의자와 책상을 구둣발로 밟고 올라선다. 하지만 그는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책상을 단단한 밑창으로 밟으며 파란 상자에 괴로워하는 다인을 밟는다. 어떤 작품에서는 압제에 저항하던 동작이 이 연극에서는 압제가 되어 나타났다.

 

희수 외의 등장인물들도 파란 상자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유진은 파란 상자를 이겨내지 못했으며, 의사는 다인의 고민을 들어주며 때때로 질문을 던진다. 지원은 파란 상자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다인을 감싸주려고 한다. 다인은 파란 상자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대신 포용하기로 하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모든 배우들이 서로 다른 인간상을 보여주지만, 역시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희수였던 것 같다. 어쩌면 적지 않은 순간 동안 희수처럼 생각했던 내가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연극을 시작하기 전의 극장.

 

4. 마치며

 

<파란 상자>는 4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담백하게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은 파란 상자를 어떻게 보아왔냐고, 당신은 파란 상자를 가지고 있지 않냐고 묻는다. 40분의 런닝타임 동안 필자는 마음 한편으로는 연극을 보고, 마음 한편으로는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하지만 한 번쯤은 생각했어야 했던 질문을 던져주신 우헤린 배우와 출연질 일동에게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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